뒤틀어진 세계를 유랑하는 존재들에 대하여.
몇 해 전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의 과정을 목도하면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진심으로 와닿게 된 첫 경험이었다. 삶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에 주목하게 되었다. 인간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 방향에 속박된 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생의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때로는 실수로 점철된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확실한 미래를 어림 짐작하며 근거 없는 희망 혹은 불안의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 모든 생각들은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즉,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적은 것이다. 이처럼 육신과 정신을 동시에 현재에 두는 것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현재를 이루는 ‘순간’을 포착하고 인상 깊은 것들을 수집하는 것이 내 작업의 시작이다.
‘뒤틀어진 세계 Twisted World’ 시리즈는 꿈속의 순간들에 대한 연작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 끝에 도착한 뒤틀어진 세계는 복면 인간과 복면 개에게 불완전한 대피소가 된다.
이 작업은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팬데믹(pandemic)은 ‘뉴노멀’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큼 개인의 삶을 낯선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격리가 강화되며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공들여 계획했던 프로젝트들은 중단되었으며 재정 상태도 악화되었다. 고립된 시간은 무력감과 불안을 낳았고, 나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상상에 머물렀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나는 눈 뜬 세상보다 눈 감은 세상이 궁금했다. 막막한 현실을 뒤로한 채 잠으로 도피했고, 나에게 던져지는 무의식의 순간들은 하나의 서사가 되었다.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뒤틀어진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 속에는 복면으로 얼굴이 가린 존재들이 등장한다. 복면들은 뒤틀어진 세계를 정처 없이 유랑한다. 그들의 나이나 성별 등은 관람자의 시선을 통해 그저 유추할 수 있을 뿐, 정보가 한정적이다. 이러한 익명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타자의 시선에 얽매일 필요 없이 복면들을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수 있게끔 한다. 복면들은 망망대해 위의 격리된 섬에서 조난 신호를 가장한 불꽃놀이를 하거나, 섬에 가만히 앉아 윤슬이 반짝이는 순간을 만끽하기도 한다. 복면들이 때때로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땐 어디에선가 기이한 외양의 발광 오리가 나타난다. 오리의 눈알로부터 발하는 푸른 섬광은 길을 잃은 복면들이 향할 곳을 안내한다.
쓰임새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삶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과는 달리 꿈속의 복면들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순간을 즐기며 발길 닿는 대로 뒤틀어진 세계를 유랑한다. 다만, 복면들도 언젠가는 이 불완전한 대피소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건 다 꿈이니까.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진짜 순간들은 결국 현실에 존재할테니까.
꿈속의 노마드(Nomad) 복면들처럼, 잠시나마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뒤틀어진 세계 시리즈 드로잉, Acrylic and oil pastel on paper, 26x35cm / 32x32cm / 19x19cm , 2025
Daydreaming,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227.3x181.8cm, 2025
사이프러스 숲,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16.8x91cm, 2025
펠리컨의 습격 01,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45.5x112.1, 2025
펠리컨의 습격 02,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90.9x72.7cm, 2025
Crimson gate,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16.8x91cm, 2025
헤엄치지 않는 오리배,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90.9x72.7cm, 2025
빛을 따라가 01,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빛을 따라가 02,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빛을 따라가 03,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빛을 따라가 04,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90.9x72.7cm, 2025
빛을 따라가 05,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Drifting wishes,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A floating path on the water,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Beyond the wave,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표류,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72.7x60.6cm, 2025
유영,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90.9x72.7cm, 2025
Underwater flight,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53x45.5cm, 2025
Wanderer 02,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53x45.5cm, 2025